행함은 구원의 결과이지 조건이 아니다

박성하 목사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율법은 구원 받은 자들의 삶의 이정표이다

송태흔 목사
(예장합동 동인교회)

‘안식일’ 교리를 다룰 때, 흔히 제기되는 문제 중 하나가 ‘율법주의’다. 율법주의를 국어사전에서는 “율법을 그대로 신의 말씀으로 믿고, 율법과 실제 생활과의 일치를 가장 중히 여기는 주의”라고 했고, 기독교사전에서는 “(국어사전과 비슷한 설명 후) 신학사에서는 인간의 선행이나 율법준수를 칭의나 구원의 수단으로 주장하는 이론을 말한다”고 정의했다.

율법의 제정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려는 자세나 태도는 잘못이 아니라 오히려 바람직한 것이다. ‘율법주의’의 상대개념을 ‘믿음주의’라고 할 때, 믿음주의가 ‘믿기만 하면 율법을 범해도 괜찮다’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간의 선행이나 율법준수를 칭의나 구원의 수단”으로 삼거나 주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고 하였기 때문이다.

1. 율법에 대한 오해

현대교회의 가장 큰 불행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오해와 거부감이다. 일찍이 사도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고 물었다. 그리고 단호히 “그럴 수 없느니라”(롬 7:7)고 답했다. 오히려 바울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고 말한다.

본래 율법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겔 20:11)게 하기 위해 주어졌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영생의 방법을 묻는 부자 청년에게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고 말씀하신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범죄한 사실에 있다. 바울은 율법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자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롬 7:10)고 탄식했다.

사람이 율법을 범하면 ‘율법’이 아니라 ‘율법의 기능’이 변경된다. 이것은 마치 도로교통법이 운전자를 ‘보호’하는 기능을 하다가, 법을 위반하면 법이 아니라 그 기능이 변경되어 위반자를 ‘처벌’하는 것과 같다. 범죄자에게 율법이 하는 일은 “죄를 깨닫게”(롬 3:20)하는 것이요,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다. 그러나 이 절망이 구세주를 찾게 한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갈 3:24)이라고 한 것이다.

2.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구원

 성경은 우리가 의롭게 되거나 구원을 얻는 방법에 대하여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전혀 오해의 소지가 없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 9)

만일 사람이 어떤 선행이나 율법을 지킨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성경은 우리 ‘행함의 무가치성’ 뿐 아니라 우리의 ‘무능함’에 대해서도 말한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3. 믿음과 행함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서 “오직 믿음으로”와 상충되는 듯한 표현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 2:13)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24)

그렇다면 성경의 가르침이 모순되는가? 그렇지 않다. 믿음과 행함에 대한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은 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② 하나님의 구원에는 행함이 따른다는 것이다. 이것을 야고보는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고 설명하였다.

어떤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반대로 가르친다. 바울은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8:33)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고 말한다.

본 교회도 바울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최근에 출판된 한 주석은 “유대인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 즉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가 마치 율법이 필요없다는 율법무용론의 교리인줄 알았으나 본절을 통해서 그 의문을 완전하게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이다.”(카리스종합주석, 제15권, 302. 기독지혜사)라고 설명했다.

4. 결론

본 교회 “기본신조, 19”는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얻는 것이요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계명에 대한 순종이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완전히 조화된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 대신,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게 된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7)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원받은 우리에게,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로부터 참된 자유를 누리기 위해 율법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믿는다.

1. 서론

오늘날 신학자들은 중세시대를 보통 신학과 교회의 암흑기로 규정한다. 중세기의 신학과 교회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서 존재하지 못하고 인간의 경험과 행동주의적인 학문을 통한 인본주의적 경향을 심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중세기에 난무한 인본주의적 경향은 신학과 말씀의 독점화 또는 특정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것이 통설이다. 중세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일반 성도들에게 대중화되지 못하고, 오직 성직자들만 알고 가르칠 수 있도록 특정화, 독점화 되어 있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중세기와는 매우 다르게 평신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고 연구할 수 있는 자유가 부여되므로 성경 말씀의 대중화가 비로소 이뤄졌다. 그러나 말씀의 대중화를 이룬 현대에서 혹자는 성경의 구절을 한 쪽에만 치중하여 이해하는 신학의 편협화를 낳게 되었다.

그들은 성경만을 읽고 이해하고 암기하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알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 것이다. 성경구절만을 부분적으로 잘라서 제시하면 모든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성경만을 읽고 암기하는 방식으로는 올바른 교회를 성경대로 이룰 수가 없다. 성경을 올바로 안다고 하는 것은 성경의 구절만을 알고, 암기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을 제대로 안다고 하는 것은 성경의 구절들을 제시하고 알 뿐만 아니라, 성경 계시 전체의 빛 속에서 균형 있게 구절을 해석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신학자들 간에 논쟁이 되고 있는 ‘믿음과 행위’의 문제도 결국 신학의 편협화 속에서 나온 현대적인 산물인 것이다.

임의로 성경에 나타난 소수의 구절 (글자)을 선별해서 자신만의 신학적인 사상을 연역적으로 꿰어내는 것은 올바른 성숙한 자세가 아니다. 성경 전체의 이해 (빛) 속에서 한 부분을 해석하는 올바른 방법을 선택해야 된다.

2. 올바른 개혁주의의 원리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은 신학의 대중화를 역동적으로 수용하고, 신학의 편협화를 최소화 할수 있는 신학의 방법을 찾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지금까지 시중에 등장한 수 많은 방법 중에서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고 주님의 교회를 올바로 바라 볼 수 있는 적절한 신학적 도구 (방법)는 개혁주의라는 확신이 생긴다.

전통적으로 개혁주의는 칼빈주의와 일치하는 개념으로 보통 생각한다. 사실 개혁주의에 대한 정의는 논자에 따라 다양할 수 밖에 없지만 (주로 4가지 정도 이론이 존재), 지금까지 동의된 개념으로는 가장 좁은 의미의 개혁주의가 칼빈주의라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개혁주의를 칼빈이 말했던 5대리를 통해서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즉, 인간의 전적인 부패 (Total depravity), 하나님의 무조건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그리스도의 제한속죄 (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인 은혜 (Irresistable grace),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등을 통해서 개혁주의의 내용을 확정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위에서 나열한 칼빈주의 5대 교리는 17세기 화란의 알미니우스 (전적인 인간의 행위 구원론 주창)를 추종하던 사람들에 대항해서 정통교회의 답변으로서 형성된 역사적인 산물일 뿐이다. 따라서 칼빈의 5대 교리를 개혁주의의 신학의 모든 것으로 이해해서는 개혁주의를 매우 편협 되게 만들 수 있다.

물론 개혁주의 신학이 위에서 언급한 칼빈의 5대교리 모두를 능동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칼빈의 5대교리를 뛰어넘어서 좀더 포괄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3. 올바른 개혁주의의 원리

개혁주의는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3가지의 중요한 원리 속에서 정립된다고 보여진다.

첫째로 개혁주는 신, 구약 성경 66권의 말씀만을 최고, 최대의 권위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제일 원리로 삼는다. 학자들이 신학을 정립하거나, 성도들이 이 땅에서 다양한 삶을 살 때 그것들의 옳고 그름의 표준을 제시하는 유일한 교과서는 신, 구약 성경 66권 이외에 다른 것들은 절대적인 권위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외경이나, 어떤 인간 지도자들의 책들, 심지어 어떤 교파의 논리적인 교리서들도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약간의 참고문헌일 뿐이지 그것들이 인간의 삶과 신학의 정통 교과서가 되어서는 개혁주의적인 삶 또는 개혁주의적인 신학이라고 말해질 수 없다. 개혁주의에서 성경만이 최고, 최대의 지침서라는 것은 신학적인 영역 이외에 철학 법학 정치학 등 일반학문을 모두 망라한다. 세상의 어떤 분야도 성경을 벗어나서 정립되거나 표준이 마련 되어지면 그것은 개혁주의적인 태도가 아닌 것이다.

둘째로 개혁주의 원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기초로 하고 있다. 사실상 신, 구약 성경 66권의 내용이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그대로 인정하여 기록 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신, 구약 성경 66권을 믿는다면 하나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포함한 온 우주가 하나님에 의해서 태초에 계획 (작정)되었고, 예정되었고, 원본대로 오차 없이 창조되어서 지금도 하나님의 정확한 손길을 통해서 운행, 섭리되고 있다. 온 우주 속에 존재하고 있는 만사만물 모두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생성되고, 사장되고, 움직이고 있다고 믿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근본적인 원리이다. 인간의 행위나 능력을 통해서 세상의 사건이 일어나고, 성숙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해서만 움직인다는 믿음이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이다. 사하라 사막에 살고 있는 불개미 뒷다리에 난 털 하나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계획이 아니면 움직일 수가 없다.

셋째로 개혁주의는 이 세상에 피조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사역의 역동적인 도구’ 라고 하는 원리를 존중한다. 이 세 번째 원리는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고 사역하는 그것의 핵심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의해서만 움직여지고 있는 도구라고 믿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원리를 인정하면 당연히 도출되는 원리이다. 이성적인 능력을 통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 마저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벗어나서 행사될 수 없다는 원리이다. 결국 개혁주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의 구원문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한 산물이며, 은혜의 산물이다. 절대로 인간의 행위나 공로를 통해서 이루질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4. 개혁주의 입장에서 믿음과 행위

그렇다면 개혁주의 입장에서 믿음과 행위는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가? 이 물음은 복음과 율법의 관계라고 하는 주제를 발생시킨다. 사실 역사적으로 ‘오직 믿음’ 이라고 하는 종교개혁자들의 복음강조 때문에 율법 (행위)이 매우 약화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율법을 지킬 필요도 없다고 하는 사상이 부분적으로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 그리고 개혁주의 신학은 율법을 절대로 무시하지 않는다. 율법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에 대한 규정이고, 법이고, 표준이기 때문이다. 신학적인 용어로 바꾸면 점진적인 성화를 이루는 방법이요, 목표요, 길을 율법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의 율법은 신, 구약 성경 모두를 포함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성도가 성경대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율법은 구원의 방도가 아니요, 구원 받은 자들의 당연한 이정표인 것을 알아야 한다.


출처 : http://www.allthatnews.co.kr/news/articleList.html?sc_serial_code=SRN42
2007/09/18 18:28 2007/09/18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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